마침내 홀로 선 19세기 신여성 노라와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노라'들 이야기

입력 2024-01-07 18:02   수정 2024-01-08 00:19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1879) 주인공 노라는 남편의 아내, 아이들의 어머니로 살다가 문득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렸단 점을 깨닫는다. 마침내 19세기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금기된 이혼이란 방법을 택하고 집을 뛰쳐나간다. 그렇게 그녀는 ‘신여성’의 대명사가 됐고, ‘노라이즘’(여성의 독립된 지위를 확립하려는 주의)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인형의 집’이 발표된 지 140년이 지난 2019년, 영국의 극작가 새뮤얼 애덤슨이 쓴 희곡 ‘와이프’도 어딘가를 뛰쳐나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다만 이 작품엔 집이 아니라 벽장 밖으로 뛰어나온 게이와 레즈비언이 등장한다(성소수자가 본인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것을 통상 ‘벽장 밖으로 나온다’고 표현한다).

연극 ‘와이프’엔 1959년부터 1988년, 2024년, 2046년 등 4개 시대에 걸쳐 ‘인형의 집’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나타난다. 1959년엔 ‘인형의 집’이 끝나고 노라를 연기한 배우 수잔나의 대기실에 데이지·로버트 부부가 찾아오는데, 수잔나와 데이지는 사실 레즈비언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인형의 집’이 여성 인권을 외쳤다면, ‘와이프’는 성소수자의 권리를 이야기한다. 시대와 주체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나다움을 찾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1959년의 데이지는 본인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것을 포기하고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억지로 유지한다. 1988년엔 게이라는 이유로 술집에서 쫓겨나는 에릭과 아이바가 등장하고, 2024년의 에릭은 성소수자 권리 행진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이들 모두 19세기의 노라처럼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기를 들고 자신만의 옳음을 지켜내기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연출이 돋보이는 연극이다. 무대 위 거울을 통해 배우의 표정을 보게 하는 연출과 강렬한 색감의 조명디자인이 인상적이다. 출연하는 모든 배우가 작품 속 흐르는 시대 속에서 1인 다역을 소화하는 걸 보는 것도 흥미롭다. 가령 1959년에 데이지의 가부장적인 남편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다음 막인 1988년에선 본인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싸움닭 게이’ 아이바로 변신한다.

연극 장르에 대한 애정도 담겨 있다. 세계 무대에 수없이 오르며 고전이 된 연극 ‘인형의 집’이 시대별로 어떻게 다시 창조되는지를 바라보는 것도 재밌다. 얼굴에 일종의 스타킹을 뒤집어쓴 형태로 몸부림치면서 노라의 탈출을 표현하거나, 노라 역할을 남성 배우가 맡는 등 시대가 지날수록 다소 난해하고 파격적인 형태로 변모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장르에 대한 자아비판과 고민 등이 엿보인다. 공연은 2월 8일까지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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